
월산대군 사저로만 알려진 덕수궁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버린 계유정난의 산실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조선 초기, 세조가 수양대군으로 있을 때 덕수궁 권역이 명례궁으로 불렸습니다. 그 표지석이 덕수궁 돌담 밖에 세워져 있습니다.
한데, '세조의 잠저는 니현에 있었다'라는 야사를 내세우며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야사에는 진고개(니현, 泥峴)라는 말이 무수히 나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개 이름으로 붙이기 좋아하는 명칭이 진고개, 여우고개, 박석고개입니다.
지금이야 도로 포장률이 높지만, 포장이란 개념마저 없던 시절. 구릉에 지하수가 노출되면 진고개가 되고 그 진고개에 돌을 깔면 박석고개가 되었습니다.

개연성도 있습니다. 옛 기록에는 오늘날의 <조선일보> 사옥 근처를 '황토현'이라고 했습니다. 황토는 마사토(굵은 모래)가 아닙니다. 습기를 머금고 있는 무른 흙입니다. 황토현과 연결된 곳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능이 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능을 파헤쳐 석물은 광통교 건설에 쓰고 유골은 사한리 계곡에 버리다시피 했습니다. 정릉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묘를 파헤친 곳은 별로 다듬지 않습니다. 하물며 왕이 버린 묘 터를 누가 감히 손대겠습니까. 진흙탕 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개연성 가지고 성립이 안 됩니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습니다. 영조 45년 11월 2일. '임금이 황화방 명례궁에 거동하였다. 명례궁은 인조가 계해년에 즉위한 곳으로 본명은 경운궁이다.'(上幸皇華坊明禮宮。宮卽仁祖癸亥卽位之所, 本名慶運宮)
시작된 권력 암투... 명례궁에서 작성된 살생부

세종의 맏아들(훗날 문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혼인한 왕자들은 궐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습니다. 왕실의 법도입니다. 이때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명례궁으로 나왔고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옥인동으로 나왔습니다. 수양이 아버지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집이 오늘날의 덕수궁입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권력 암투가 벌어집니다. 경덕궁지기 한명회가 권남의 천거로 명례궁에 드나들면서 야심 많은 수양대군의 권력욕에 불을 지핍니다. 계유정난을 기획하고 살생부를 작성한 곳이 명례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