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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7월 19일 오후 7시 26분]
사드배치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한민구 국방장관은 8일 국회를 찾아 "북한의 핵과 탄도미사일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한미동맹의 군사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조치로 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주한미군에 배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륙의 지각변동을 감지하지 못하면 환란을 겪었습니다.
1636년 12월 1일. 심양을 출발한 청나라 군사 12만 명이 압록강변에 포진했습니다.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쳐들어갈 것이다'라고 위협을 가하며 조선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들도 잘 압니다. 병서(兵書)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보다 고수가 부전이승(不戰而勝)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말입니다.
청나라는 부전이승을 노리고 단둥에서 머뭇거렸습니다. 헌데, 서북 방면군 사령관 도원수 김자점은 '청나라 군사가 출동했다는 소식이 도성에 알려지면 괜히 소란스러워진다'고 정방산성에서 봉화를 차단해버립니다.
조선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청나라군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의주를 지키던 임경업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선두를 보내고 후미를 공략하겠다는 복안이었지만 그들은 청나라 군대를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성안에 바짝 엎드려 있었습니다.
청나라 군사는 질풍노도와 같이 정주-평양-개성으로 치고 내려왔습니다. 청군이 개성을 지나간 연후에야 '청나라 군사가 개성을 통과했다'는 개성유수의 장계가 올라옵니다. 그 만큼 전선 소식이 깜깜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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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군대가 양철리(녹번리)에 도착했을 때 인조 임금이 부랴부랴 궁을 나섭니다. 지난 난리(정묘호란)에 몸을 지켜 주었던 강화도로 가기 위해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강화 가는 길이 끊겼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정묘호란 때 임금을 놓쳐버린 청나라는 지난번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특공대가 행주에서 강을 건너 김포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구문(광희문)을 빠져나온 인조는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 산성에는 50일분의 식량과 13000명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여덟 아들을 데리고 나가 목숨을 바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윤황은 아들 윤선거와 부인은 강화도로 보내고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강화에 들어간 윤선거는 김익환, 김상용 등과 함께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순절하기로 한 약속을 깨고 모친과 강화도를 빠져나옵니다. 그의 명분은 '아버지가 있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아버지와 같이 죽겠다'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않고 충청도 금산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동지섣달 살을 에는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면 밤사이 보초 서던 군사가 앉은 그대로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먹을 식량이 없어 군사들이